아주 큰 화제가 되진 않았지만 이번 미국 대선에서 가장 흥미롭게 본 사건 중 하나는, 워싱턴포스트가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하지 않기로 한 일이었다. 이를 두고 WP 내외에서 거센 논란이 일었다. 미국 언론사들은 종종 사설을 통해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만, WP는 1976년부터 최근까지 (1988년을 제외하고) 매번 민주당 후보를 지지해왔기에 이번 변화가 특히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사건은 제프 베조스가 WP 편집진이 준비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지지 사설을 철회시키면서 시작됐다. WP는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을 중단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고, 이 결정은 언론의 독립성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논란을 피해 가지 못했다. 베조스는 이후 “신문의 지지 선언이 선거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매체의 편향성을 드러낼 뿐”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사주가 지면을 통해 입장을 발표한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The hard truth: Americans don’t trust the news media]
베조스는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매체 신뢰성 제고를 위해서”라며 해명했지만, 해리스 지지 사설을 막은 것이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의혹은 여전했다.
베조스가 창립한 항공우주기업 블루오리진 고위 임원이 대선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발표한 지 몇시간 뒤 트럼프와 만난 사실이 밝혀지며 그 의혹은 더 짙어졌다. 베조스조차도 매우 적극적으로 트럼프에 고개를 숙인 꼴이 된 것.
전 WP 편집장 마틴 배런은 “이 결정이 선거를 불과 몇 주 앞두고 내려진 점, 그리고 편집국의 충분한 논의 없이 진행된 점이 문제”라며 비판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유명한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틴은 트럼프가 미국 민주주의에 미치는 위협을 간과한 처사라고 비난했다.
만평으로 퓰리처상 수상 경력도 있는 WP의 유명 만화가 앤 텔네이스는 신문의 슬로건 “Democracy Dies in Darkness(민주주의는 어둠 속에서 죽는다)”를 풍자하며, 이 사건이 WP의 가치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라고 그림을 통해 항의했다. 또한 대선이 끝난 뒤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어디론가 떠나는 The end.라는 만평도 게재했다.
외부에서도 파장은 컸다. 보도에 따르면 이번 논란 이후 하루 만에 약 20~25만 명의 WP 독자가 디지털 구독을 해지했다고 한다. 250만 구독자의 10%가 이탈한 셈이다. 매우 큰 타격이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WP는 조용히 웃었을 것이다. 게다가 트럼프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딜이 확실한 트럼프는 WP를 기억할 것이다.
제프 베이조스의 결정과 관련해 더 재밌었던 건, 그의 글과 이 결정을 비판하는 칼럼들이 같은 WP에 함께 실렸다는 사실이다. 이는 언론사 내부에서의 복잡한 권력 역학을 암시하는 한편 자유로운 의견 표명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사주인 베조스가 WP의 운영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장과 이를 반박하는 목소리가 모두 지면에 실린다? 한국에선 보기 힘든 모습이다.
그렇지만 반대로, WP가 독립성과 편집권의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베조스는 단순히 의견을 제시하는 수준을 넘어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모순된 상황은 언론사의 사주가 어느 정도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지, 또 언론의 독립성이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지를 다시금 고민하게 만든다. 언론에게 자본과 권력은 벗이자 적이다.